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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왜 인간이 되려고 했었더라?'
웨닐리아 알붐이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갤러리 앨범'에는 이따금씩 잠시 멈추어 숨 한 번 돌릴 시간, 자신의 공간을 돌아보며 생각을 정돈할 시간, 처리해야 할 일의 순서를 다듬고 그 경과를 지켜볼 조금의 틈조차도 없을 만큼 바쁜 순간이 있다. 새로 기획한 전시의 첫 날 또는 마지막날, 경매가 열리는 날, 혹은 직원이 갑작스레 결근하는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러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새로 기획한 전시의 첫 날이자 지난 전시회를 마무리하는 경매가 있는 날이었으며, 직원 하나가 출근길에 사고를 당해 결근했다. 쉬운 말로, 정말 최악의 날이었다.
그런 최악의 날을 보내고나면, 무기력과 우울에 빠져 쓸데없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특히나, 주변에 신경써야할 인간이 하나도 없다면, 신경써주는 인간이 하나도 없다면 생각의 바다에 잠겨 한없이 가라앉기에 딱 좋은 환경이 아닐까?
덧붙이자면 그 자신이 원체 생각이 많고 겉과 달리 속은 우울하기 그지없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밖에도 최근 그 자신에게 생긴 여러 변화들 역시 원인이라면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유야 어쨌든 스스로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웨닐리아는 제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인간이 되고자 했던 이유, 그러니까 그건 '동경' 혹은 '질투'라 부르는 것, 그도 아니면 '증오' 때문이었을까?
액자 밖의 세상은, 액자 밖의 인간들은 늘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처음엔 공포에 질린, 불안에 짓눌린 제게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가 액자 속 '백색 불안으로의 익사'를 마주하고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상한 것이 되었다. 공포를 떨쳐내고 불안으로부터 벗어난 듯, 대게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웃음을 흘리기도 하는, 깊은 밤 산 속의 조난자가 구조헬기를 발견했을 때의 표정이 그러할까,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이들 사이에서 동향의 사람을 만났을 때의 표정이 그러할까, 정체불명의 무언가에게 쫓겨 정신없이 달아나던 도중에 그것을 쳐죽일 무기를 발견했을 때의 표정, 새까만 공간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던 이의 눈에 빛 한 줌과 그 너머의 손길이 보이는 때의 표정이 그러할까.
그건 구원받은 이의 표정이었다.
그 구원이, 제게 불안을 떠맡기고 일방적으로 구원을 받아가는 그들이 부러웠고, 동시에 한없이 미웠다. '백색 불안으로의 익사'는 참을 수 없는 그 미움을, 자신의 창조주에게로 돌렸다. 왜 저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케 했는지, 왜 자신은 구원하지 않는지, 왜 자신을 이유없는 불안 속에 익사하는 존재로 만들었는지, 왜 자신이 그것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했는지, 대답을 듣지 못하는 그 모든 질문들이 쌓여 그를 증오하게 했다.
구원받고 싶었고, 증오를 표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창조주를 죽이고 인간이 되었다. 이유고 방법이고 죄 불순한 것밖에 없었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애초에 정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니 불순할 수밖에.
그래서, 인간이 되어 이루고자 했던 것을 전부 이루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창조주의 죽음은 증오는 해결해주었어도 구원은 해결해주지 않았으므로. 만일 자신이 인간이 됨으로써 구원받은 것이라면, 저 역시도 그 바보같은 표정을 지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으니까. 그럴 수 없었으니까. 그 대신에 더 많은 불안과 공포에 얽매인, 어떻게든 그것을 가리기 위한 표정만을 지을 수 있었으니까.
웨닐리아 알붐은, 어쩌면 그건 자신이 불순한 존재이기 때문이리라고 생각했다. 불순한 것에게 구원을 내려주는 이는 없는 것이 당연하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웨닐리아 알붐은 자신이 습관처럼 익사하고 있음을 깨닫고 생각을 멈추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야?'
'세상에, 지금도 만만치 않지만 그 땐 비교도 못할 만큼 자조적이었구나.'
'그러니 그런 제목이 붙지.'
'아니면, 그런 제목이 붙었기 때문에 이런 성격이 된 걸까?'
'어느 쪽이든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지. 이런 생각은 아무런 영양가도 없어.'
'이럴 거면 차라리 쉴 틈 없이 바쁜게 더 나을텐데. 틈만 나면 생각에 잠겨 예민해지니까, 아예 생각할 틈도 없게...'
'아니지, 생각하지 않는 것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내겐 상관없는 얘기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인간이라 칭할 수 없는 존재니까.'
그가 때때로 곁에 아무도 없을 때, 혼자 있을 때에 예민해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혼자 있으면, 부정적인 생각에 잠겨버린다. 스스로 그것을 느끼고 끊으려고 해도, 결국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러고나면, 한동안은 예민해져서 쉽게 짜증을 내고, 단호해지며, 판단력이 흐려져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을 하곤 골치아픈 실수를 저지른다.
아마 오늘도 그런 반복을 되풀이 할 것이다.
"베니......?"
당신이 없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아, 에디. 언제 왔어요?"
그런 반복 속에서 언제 들킬지 모르는 불안이나 공포 따위를 끌어안고 가라앉았을 것이다.
"좀 전에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불러도 대답이 없어요?"
그러나 당신은 지금 웨닐리아 알붐의 앞에 있고, 웨닐리아 알붐은 당신의 호박색의 눈과 마주한 순간 반가움에 휘발해버린 불안과, 희미한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저를 덮쳐오는 안정, 그리고 그 밖에 아직은 형언할 수 없는, 미숙한, 그러나 흰 도화지 위에 튄 검은 얼룩처럼 선명한 감정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음미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ㅂ, 베니?"
당신을 끌어안고,
"무슨 일 있었어요? 갑자기......"
셔츠를 뜨겁게 적시는 눈물을 흘리면, 잠시 놀란 표정으로 아무말 없이 마주 안아주는 당신을 향해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웃음을 내보이며,
"...그냥, 오늘 조금 힘들었는데...... 에디를 보니 다 괜찮아져서요. 아무래도 좋을 만큼."
그런 바보같은 표정을 한 채로, 당신의 입술 위로 입을 맞추었다.
눈물이 섞여 조금 짭쪼름한, 우느라 호흡이 흐트러져 턱없이 짧게 느껴지는, 그럼에도 충만한 감정이 담긴 키스를, 당신에게.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번지는 웃음,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세상에 당신과 나, 단 둘만이 남은 것만 같은 감각,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지는 얼굴, 공포가 아닌 다른 감정의 지배를 받아 쿵쾅거리는 심장,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간지럼이라도 태우는 듯 자꾸만 간질거리는 속까지.
이것이 구원이 아닐 수는 없었다. 그 구원이, 사랑이 아닐 순 없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에디."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이토록 선명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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